후학들에게 뭔가 도움이 되는 말을 써달라는 청탁을 어느 여학생이 해왔다. 나는 이것저것 핑계를 대고 다음에 쓰겠다고 했다. 한두 번 핑계를 대고 사양하면 떨어져 나가는 것이 보통인데 이 여학생은 보통이 아니다. 또 청탁을 해왔다. 나에게 이런 글을 쓰라고 청탁을 하는 것도 보통이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후학들에게 모범이 되는 예술가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별로 할 말이 없는 사람으로 보이기 때문에 이런 글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은 적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여학생은 나에게 왜 이런 글을 청탁하는 것일까. 그것도 쉽게 떨어질 것 같지 않은 끈기와 집념을 갖고? 그래. 바로 그 끈기와 집념이 필요해. 예술가가 되려면... 일종의 중독이라고 할까...?
파리 유학시절에 고등사범을 다니는 프랑스 여학생을 사귄 적이 있는데 이 여학생은 서슴지 않고 자신이 공산주의자라 했다. 공산주의가 불법인 나라에서 온 나에겐 섬뜩했지만 그녀는 내가 만난 한반도의 공산주의자와는 달랐다. 공산주의가 정의라는 생각도 하는 것 같지 않았고, 나를 포섭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너는 공산주의가 뭔지도 몰라. 뭔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공산주의자냐?”
“너는 뭐냐? 자본주의자냐? 너는 자본주의가 뭔지 알아?”
“그래 안다. 자본주의는 돈을 숭배하고 돈의 노예가 되는 거야. 돈에 중독된다고나 할까...”
“돈의 노예가 되고 돈에 중독되는 것 보다는 공산주의라는 이상의 노예가 되고 그 이상에 중독되는 것이 낫지 않니?”
“아니야. 공산주의는 현실적으로는 권력의 노예가 되고 권력에 중독되는 것이야. 권력에 중독되는 것보다는 돈에 중독되는 것이 나아.”
그런 대화를 가진 뒤 나는 막연히 권력의 노예가 되고 중독되느니 돈에 중독되는 것이 낫다. 그러니 공산주의냐, 자본주의냐, 택일을 하라고 한다면 자본주의를 택하겠다는 생각을 해왔다. 그런데 나는 그 어느 쪽도 택하지 않았다. 그 어느 쪽에도 중독되지 않고 제3의 그 무언가에 중독되어 살아왔다.
권력도 아니고 돈도 아닌 그 무언가에 따라서 예술가의 길은 결정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러므로 예술가의 길에 뜻을 둔 젊은이는 먼저 그 무엇을 발견해야 한다. 그 무엇을 발견할 수 없다면 권력이나 돈을 탐내고 일찌감치 그 노예가 되는 것이 현명하다.
예술가의 작업은 무엇보다도 시간(時間)과의 싸움이라고 할까, 대결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살아있는 동물은 그들 나름대로 일생(一生)을 갖고 있다. 형태를 가진 모든 물체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언젠가 부서지고, 허물어지고, 사라져간다. 모든 생명과 물체는 어떤 하나의 시간 속에 생성(生成)되었다가 소멸되기 마련이다. 길고 짧은 차이는 있겠지만 아무도 이 시간의 흐름과 운명을 거역할 수 없다. 죽음과 소멸의 법칙을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은 이 거역할 수 없는 법칙에 도전하기 위해서 종교를 만들고 예술을 생각해낸 것이 아닐까. 피창조물인 인간이 무엇인가를 창조하겠다는 것은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낸 신(神)에 대한 도전이요, 시간에 대한 도전이다.
예술가가 되겠다는 것은 엄청난 야심이다. 그 엄청난 야심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한 평생이 너무나 짧다. 그러니 뭔가에 중독된 사람처럼 집착해야 한다. 그리고 중독과 집착은 그 누구도 닮지 않은 오직 자기 혼자만의 집착이요, 중독이어야 한다. 유행을 따르지 않고, 틀에 박히지 않고, 자유로운 정신을 갖고, 시간의 전제(專制)에 저항하는 자세가 필요할는지 모른다.
2004~ 사람박물관 얼굴관장
2000~2003 한국문화예술진흥원원장
1991~ 대한민국예술원회원
1981~2002 국제극예술협회(ITI) 세계본부집행위원/부회장/회장
1997~1981 중앙대학교 예술대학학과장/학장/ 대학원장
1966~ 극단 자유예술감독
1932 출생
주요 작품 <따라지의 향연> <피의 결혼> <무엇이 될꼬하니> <동리자전> <바람부는 날에도 꽃은 피네> <수탉이 안울면 암탉이라도>
많은 반성을 하게 만드는 글. 마음을 때리는 글.
이번에 원로 극작가 김정옥씨에게 글을 청탁했는데 끈질기게 부탁했더니 이런 글을ㅎ
"내가 너무 바쁜데, 학생 목소리가 너무 좋아서 해준다고 해부렀네ㅎㅎ"
좋은 사람들이 많다.

덧글
예이나 2009/04/14 14:25 # 삭제 답글
결국 했군! 장하다 이미뉘wheee 2009/04/16 00:57 #
해냈다네!!! ㅠ_ㅠ